그들은 서로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무슨 갑자기 매정스러워졌다는 것은 아니다. 갈 데까지 가는 동안 마물러두어야 할 마음의 매듭을 혼자서 소리없이 풀자면, 나누어진 뱃간으로, 더 바르게는 저마다 가슴속으로 몸을 사려야 했기 때문에이다.
맺음? 맺음말이라는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누리와 삶에 대한 맺음말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만 잡히면 삶 같은 건 아주 시시해지는 그런 무엇일까. 아니 반드시 그럴 것까지는 없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떻게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날엣날마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치르는 모든 따위의 일이라면 아무런 뜻도 거기에서 찾지 못한다.
실컷 맛본 끝에 오는 싫증이 아니다. 애당초부터 이게 아닐 텐데, 이런 게 아니지 하는 겉돎이 앞선다. 삶이 시들해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삶은, 그저 살기 위하여 있다. 이 말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런 뜻 없고 아리송한 말을 할 때는, 그뒤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진짜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으나, 그게 무언지는 알 수 없는 채 값진 때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자꾸만, 아랑곳없이 흘러가는 것이 두렵다.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그 대수롭지 않음의 테두리에서 문득 걸어나오면서, 놀라운 섬뜩함으로 맞서오는 것을 알고 있다.
믿음 없는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려고, 힘껏 산다, 때의 한점 한점을 핏방울처럼 진하게 산다, 수없이 고꾸라져서 수없이 정강이를 벗기더라도 말쑥한 정강이를 가지고 늙느니보다는 낫다,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어보지만 어떻게 하면 힘껏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캄캄했고, 피처럼 진한 시간은 어디 숨어 있는지 꼬리도 찾을 수 없을 뿐, 정강이를 벗기자면 걸려서 넘어갈 돌부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의 발부리에 걸리는 것이라곤 영미가 기르는 고양이밖에 없다.
자기라는 낱말 속에는 밥이며, 신발, 양말, 옷, 이불, 잠자리, 납부금, 담배, 우산... 그런 물건이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물건에서 그것들 모두를 빼버리고 남는 게 자기였다. 모든 것을 드러낸 다음까지, 덩그렇게 남는 의심할 수 없는 마지막 것.
예감이란 말이 있다. 자기가 애쓰지 않는데도, 어떤 일이 다가옴을 살갗으로 느끼는 걸 예감이라고 부른다.
자기 삶이 어떤 나무에서 익을 대로 익은 끝에, 곱다랗게 자리잡고 있던 가지에서 뚝 떨어지기 앞선 얼마 동안, 새로운 움직임을 마련하는 숨결이, 아무래도 본인에게 새어나게 마련이다.
오늘날 세상처럼 사람이 '영웅의 삶'을 살 수 없는 때도 없다.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고, 조건이 달라진 것이다. 조건을 쑥 뽑은 다음에 그 어떤 알맹이가 남는다는 건, 곧 아름다운 미신이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건 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 속았다 하고 떼었다 할 때, 꾸어주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억지가 아닐까. '사랑'이란 말 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 그런, 잘못과 헛된 바람과 헛믿음으로 가득찬 말이 바로 사랑이다.
마음은 몸을 따른다. 몸이 없었던들, 무얼 가지고,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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